그럼 적장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멍청한 놈이다! 당의 대군에 맞서 고구려의 황도를 지켜야 할 수만의 병력이 오히려 수천 리 밖으로 더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이다. 결사대원들 중 몇 명은 잔혹한 당군의 처사를 비난하며 차라리 빨리 죽여 달라고 고함을 쳤지만 사람이 배가 갈라지고 나서 오래 버틸 수는 없는 법이다.
그가 아직 사다리에 매달리지 못한 부하들의 전의를 북돋아 주기 위해 호기롭게 소리를 질렀다. 기라성 같은 참석자들의 면면만 보아도 검일에 대한 고구려 조야의 평가와 기대를 알 만 했다. 지금은 전쟁이나 협상을 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자와 목책은 나성이 무너졌을 시, 그 안의 백성들이 안전한 외성으로 피난한 시간을 벌기 위한 인위적인 장애물이기도 했다.
대신 신라에는 대제의 밝은 다스림 앞에 만백성이 평등하다는 고구려적인 신분 개념이 정략적인 목표를 가진 의도적인 부추김 속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같은 시간 살수 남안 대고산 정상의 장대신호기 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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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겁결에 들고 있던 검으로 막아보았지만 애초에 힘의 차이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컸고 고구려 검의 강도가 대해인이 쥐고 있던 검의 그것과 너무나 크게 차이가 났다. 검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당군을 바라보면서도 강철무사의 판갑과 투구를 걸친 대제 고건무가 미동도 없이 서평문 성루 한가운데 서서 군령을 내리고 있었다. 중랑장 심광과 후군 교위 작제거는 화살집단의 비상을 따라 고개를 쳐들었다가 정점을 찍고 내리 꽂히기 시작하는 수만개의 화살을 질린 눈빛으로 쳐다보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왕실의 고민은 왕실에 속한 사람들만이 잘 아는 법이지요 중국군의 침공에 평양시민들이 혼돈에 빠져 서성이던 모습들이 불타 없어진 안학궁 위에 떠도는 고구려인들의 영혼 같이 새하얀 대동강변의 물안개에 겹쳐져 서린다.
